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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교동마을 최씨고택

by 천년이음 2013. 5. 24.

경주 교동마을 최씨 고택 

 

 

나들이 가기 좋은 날씨입니다.

주말에는 비소식도 없다고 하니

가족들과 같이 함께 나들이를 다녀 와 보는 것은 어떨까요?

제가 다녀 온 곳은 경주 최씨 고택입니다 한번 보실까요

 

 

 

종목

  중요민속문화재 제27호

명칭

  경주교동최씨고택(慶州 校洞 崔氏 古宅)
분류
  유적건조물 / 주거생활 / 주거건축 / 가옥
수량 / 면적
  일곽
지정(등록)일

  1971.05.27

소재지

  경북 경주시 교동 69

시대

  조선시대

소유자(소유단체)

  영남대학교 박물관

관리자(관리단체)

  영남대학교 박물관

 

 

 

  

 

 경주의 월성 서편에는 교동이라는 마을이 있다. 신라때 국학이라는 학교시설이 있었던 마을이며, 지금의 경주향교가 그 터라고 알려진 유서 깊은 마을이다. 또 마을 끝자락에는 월정교라는 신라시대의 석교 터가 전하는데, 학교 교육에서는 효불효교로 더욱 유명한 다리이며, 최근 신라시대의 모습으로 복원하는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다. 과연 신라시대의 원형을 복원할 수 있을지 의문은 되지만, 역사 유적을 복원하여 후손들에게 전해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커다란 의미를 갖기에 충분하다.

 

 

 

 

 

이 유서 깊은 마을에는 '경주 최부자집'으로 널리 알려진 최씨의 종가도 있는데, 신라 시대 요석궁이 있던 자리라고 전하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교동은 이 최부자집을 비롯한 몇 채의 한옥들이 마을의 유구한 역사를 이야기해 주는 곳이자 흙에는 흙과 함께 신라시대의 기와조각, 토기조각, 그리고 조선시대 도자기조각 등 많은 역사 유물이 함께 담장 흙에 쌓여 있다. 담장에만 유물이 있는 것은 아니다. 최씨고택 안마당에는 신라시대 절터나 건물터에서 사용했을 법한 주춧돌과 장대석 등 많은 석조물이 조경석으로 사용되고 있어서 이 또한 즐거운 감상거리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박물관 다음으로 즐겨 찾는 장소가 되어 버렸다. 

 

 

 

 

 

 

 

 

 

 

 

 

 

 

 

 

 

 

 

 

   

마을 안쪽 넓은 골목길 안쪽에 경주최씨 종가댁과 소종가의 대문이 시선을 가로막는다. 종가댁은 현재 9대째 대대로 살고 있으며, 1700년경 이 가옥을 지었다고 하지만 확실한 시기는 알 수 없다. 지금 집을 지키는 이는 종손이 아닌 관리인이며, 소종가는 교동법주라는 전통주를 대(代)이어 생산하고 있다.

 

 

 

 

 

 

  교동에는 여러 채의 기와 고택이 있는데, 경주최씨들의 터전이다. 고택과 고택 사이의 골목길에 현대식 건물들이 난립하여 정신이 없던 것을 최근에 정비하였다. 이제는 기와집과 향교 등의 고택들만 남아 경주의 새로운 답사 명소로 거듭나고 있다.

 

 

 

 

 

 

 

 

 

 

 

 

 

 

 

 

 

 

 

 

 

  이 마을에서 역시 으뜸인 것은 경주향교의 건축물이고, 살림집으로는 경주최씨 종가댁과 소종가의 고풍스러 기와집이다. 종가댁은 사랑채, 안채, 대문채 등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중 대문채(문간채)는 중요민속자료 제27-1호로 지정되었으며, 작은 방과 큰 곳간이 있다. 문간채에는 솟을대문을 두고 청지기방을 비롯한 네 칸의 곳간이 딸려 있다. 곳간마다 문의 모양과 크기가 다른데, 이는 모양에 따라 넣는 물건도 달랐음을 짐작케 한다. 외형적으로도 모두 단순하고 똑같은 크기와 모양이 아니어서 변화에 따르는 다양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외벌대의 기단 위에 자연석 주춧돌을 세우고 둥근 기둥을 이용하여 민도리집의 맞배지붕 가구 구조를 하고 있다. 특히 창고채나 문간채의 둥근 기둥이 주목을 끄는데, 이러한 사례는 좀처럼 보기 드문 것이다. 곳간의 벽은 판벽으로 되어 있는데, 2분합 곳간문은 얼마나 자주 열고 사용하려 했는지 문지도리가 힘쓰는 머슴 같은 모습으로 튼튼한 어깨를 자랑하고 있다. 문짝은 두툼한 소나무 판재를 이용하여 단순하면서도 기품이 느껴지는 멋을 자랑한다.

 

 

 

 

 

 

 

 

대문에 들어서면 바로 정면과 작은 정원과 사랑채가 있고, 좌측인 서편으로는 잘 생긴 장대석 기단과 주춧돌이 있는 정원이 자리하고 있다. 본래의 별당이 있던 자리다. 문간채와 사랑채 사이의 마당에는 아름다운 꽃과 잘 생긴 나무, 옛날 신라시대 어느 사찰에서 사용했을 탑재와 주춧돌이 오밀조밀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다. 반면 맞배지붕의 커다란 곳간 앞에는 넓은 마당을 그대로 두어 시원한 공간을 표현하고 있다. 예부터 농업을 주로 하던 우리 조상들이 살던 한옥의 마당은 단순한 공간이라기보다 집안의 대소사를 치루는 지붕 없는 실내 공간으로 집안의 번성함과 비례하여 그 크기가 정해졌다. 그런 면에서 경주 최씨 종가의 넓은 마당과 커다란 고방채는 이 집안의 번성을 상징하는 것이다. 

 

 

 

 

 

 

 

 

 

중요민속자료 제27-2호인 최씨 종가의 창고(=곳간) 벽은 햇빛이 잘 들고 통풍이 잘 되도록 판벽으로 되어 있으며, 박공부분인 지붕 양쪽 옆면에 바람막이판인 풍판을 달아 고풍스러움을 더해 준다. 전면 다섯 칸에 측면 두 칸의 크기로 하단은 판벽으로 되어 있고 상단은 통풍창과 회벽으로 되어 있다. 이 곳간은 최씨 부자댁의 생활 법도와도 관계되는 건물로 곳간 건축물로의 건축학적 의미도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건물이다.

 

 

 

 

 


 

사랑채는 문간채의 맞은편에 있었으나 별당과 함께 1970년 11월 화재로 전소되었다가 최근에 복원하여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복원한 건물의 나무 재료들이 세월의 표현이 없어서 인지 현대식 느낌이 강하다. 본래의 모습이 지금의 모습이었는지 알 수 없으나, 사랑에 사용했던 오래된 주춧돌과 사랑 앞 정원에 놓여 있는 많은 석재들이 옛 풍경을 자아내고 있다. 특히 연화(蓮花) 모양의 돌로 된 수반에 물이라도 모아지는 날 사랑채에 앉아 서라벌 달빛이 연꽃에 휘영청 뜨면, 연꽃에 감싸 안긴 모습의 경주 달밤이 참으로 아름답다. 

 

 

 

 

  

 

   

 

 

 

 순하게 생겼는데 사람에게 덤벼들 수 있다고 하니 한 걸음 물러나게 되었다~

 

 

 

 

 

 

 

사랑채는 잘 다듬은 장대석을 이용하여 기단을 쌓고 그 위에 덤벙주초에 네모기둥을 세워 팔작지붕으로 꾸며 놓았다. 사랑채 네 칸의 반은 대청이요, 반은 온돌방이다. 띠살무늬 덧문과 격자형 미세기가 함께 딸린 사랑방의 창문은 홍송의 나뭇결이 예쁘게 표현된 머름판 위에 가지런히 꾸며져 있다. 미세기문에 창살을 하나씩 더 대어 꾸밈으로써 튼튼한 느낌을 준다. 툇마루가 딸린 사랑마루에 걸터 앉아 눈으로는 예쁜 꽃밭과 하늘에 떠가는 구름을 감상하고, 코로는 법주를 만들기 위해 누룩 띄우는 냄새를 맡고 있노라면 생활의 여유를 갖게 되고, 거기서 한옥의 참 멋도 느낄 수 있게 된다.

  

 

 

 

 

 

 

 

 

사랑의 마루 끝에 앉아 마당을 바라보면, 연화형 수반 너머로 반듯한 솟을대문이 보이고, 우측으로 작은집과의 경계를 이루는 기와 담장 아래 정원이 눈에 들어온다. 별당이 있던 터에 잘 꾸며진 화계와 기와 토석담이실 어울려 차분한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이 담장에는 수키와 두 장을 겹쳐 만든 작은 구멍을 두어, 두 집안 간의 소통 수단으로 이용하던 삶의 지혜를 느끼게 하는 멋도 표현되어 있다. 사랑채와 사랑채 사이에 있는 이 담장 구멍은 형님 동생 간의 비밀스러운 대화의 창구이자, 형제간에 맛있는 먹거리나 반가운 손님이 오면 서로 연락하여 공유하는 마음을 전하는 창구였을 것이다. 

 

 

 

 

 

 

 

 'ㄱ'자형 사랑채 누마루 아래를 왼편으로 돌아들면 긴 행랑채의 한쪽 곁에 중요민속자료 제 27-3호인 안채로 드나드는 문이 나타난다. 안채는 논산 윤증고택이나 예산 대술 수당고택들과 같이 사랑마당에서 직접 안채가 보이지 않도록 전면에 나무 판벽을 두어 오른쪽으로 돌아 들어가게끔 만들어 놓았다. 그러나 이 판벽으로 인해 안채가 전혀 안 보이는 것은 아니다. 빼꼼이 보이도록 하여 다음 장면에 기대를 모으고, 장차 나타날 모습에 대한 기대감과 신비감을 드높이려는 기법이 돋보인다. 저고리 아래로 보이는 여인내의 겨드랑이로 가슴 설레는 장면을 표현하는 모습과 같다. 이것이 한복과 한옥이 공유하는 우리 만의 멋과 아름다움이다.

 

 

 

 

 

 

 

 

 

 

 

 

 

 

 

 

 

 

 

 

 

 

 

 

 

 

 

  안채의 전체적인 평면 구성은 트인 'ㅁ'자형이나 실제로는 몸채가 'ㄷ'자형 평면을 가지고 있고, 'ㄱ'자형 사랑채와 'ㅡ'자 형 중문채가 어울려 현재의 평면구성을 보이고 있다.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에 한걸음씩 다가서면서 점차적으로 보이는 아래채의 모습에 이어 건넌방이 나타나고 전면의 모습이 다 보일라치면 장독대가 안마당 가운데를 가로막아 조금은 수줍은 듯 안채의 모습을 한꺼번에 다 보여주려 하지 않는다. 장독대 너머 비스듬히 보이는 시야로 잘 다듬은 장대석을 기단으로 삼고, 그 위에 초석과 둥근 기둥을 세워 큰 대청을 중심으로 오른쪽에 안방 세 칸이 나타난다. 이것은 보통 안방을 서쪽에, 대청을 오른쪽에 배치하는 형식에서 약간 변형된 형태로, 안방을 중심으로 아래채 쪽으로도 마루를 꾸민 것이 특징이다. 아래채로 연결되는 마루의 바라지창을 열면 별도로 독립된 후원이 나오고 이곳에 연결된 협문의 하나는 사랑채 뒤편과 직접 연결된다. 바깥주인이 하인들에게 보이지 않고 뒤뜰 협문을 통해 출입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또 이 문은 사당으로도 연결되어 사당에 불천위 제사를 지낼 때 사랑채 대청으로 안채 부엌에서 만든 음식을 손쉽게 들고 나를 수 있도록 했다. 편리성이 돋보이는 공간 구성이다. 따라서 부엌이 평면의 가장 오른쪽에 자리 잡고 있으며 부엌 아래쪽으로는 방과 광을 두었다. 대청 왼쪽에는 건넌방 두 칸, 대청, 방 두 칸을 배치하였고, 각 방과 대청에는 툇마루가 딸려있어 뜰에 내려가지 않아도 방과 대청 사이를 직접 연결하게 구성하였다.

 

 

 

 

 

   

중대문에 들어서면 안채 기단이 신라의 왕경 유적에서나 볼 수 있는 잘 생기고 긴 장대석을 2벌대로 쌓고, 그 기단 위에 다시 군더더기 없이 처리한 섬돌의 장대석이 보인다.  잘 다듬은 기둥들의 직선은 조선시대 선비의 삶을 느끼기에 충분한 표현이다. 반듯한 생활신조를 가훈으로 내려 전해오는 이 집안의 가풍과 직선적인 기둥, 보, 마루 등 어디 하나 거칠 것 없는 가옥 구조의 선율이 무관치 않다. 덧문을 열면 기둥과 기둥 안에 반듯이 일치하여 문고리에 걸리지 않고 쪽마루를 걸어 다니기에 불편하지 않도록 배려된 한옥의 세련미도 일품이다.

 

또 '아(亞)'자 무늬의 미세기가 함께 달려 겨울과 여름에 사용하는 두 기능의 문은 그 역할을 성실히 수행하고 있으며, 날개채는 머름 없이 문지방으로 처리된 것이 인상적이다. 안채의 대청마루는 건넌방으로 연결되는 문과 바라지창이 흥미롭다. 특히 안채는 앞 퇴에 반듯한 주춧돌과 둥근 기둥을 세워 지붕을 높이고 기둥 위에 보아지를 꾸며 화려하지 않지만 장중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대청의 북쪽 벽은 나무로 만든 판벽에 머름을 드린 궁판과 널판에 중대를 보강하여 국화정을 장식한 커다란 바라지창을 두고 있다. 남부지방의 주택에서나 있음직한 여름을 위한 대비로 볼 수 있는 판벽과 바라지창의 구성이다.

 

동쪽에 있는 상방으로 연결되는 문도 넉살무늬창에 창호지를 바르는 방식의 일반적인 창호 처리가 아닌 바라지창과 같은 모양의 넌출문을 달아 특이한 모습을 하고 있다. 이 대들보는 기둥이나 도리 등 다른 목재 부재와는 다르게 약간 밤색에 가깝고, 방금 누군가 들기름이라도 발라 닦아 놓은 듯한 느낌이어서 직선적인 이 집의 전체적 느낌과 더욱 어울리는 아름다움을 나타내고 있다.

 

 

 

 

 

 

국화정이 달려 아름답게 꾸며진 안방 마루의 넌출문을 열면 대청마루 뒤편으로 후원을 두고 뒷동산으로 다닐 수 있는 일각의 협문이 있다. 한옥에서는 이와 같이 집 뒤로 협문을 달아 안채에 사는 여인과 아이들이 뒷동산으로 나가 자연을 느끼며 산보할 수 있는 기능을 마련하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사회적으로 혼란한 시기에 집안에 우환이 생겨 급히 몸을 피신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면 비밀 통로로 활용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후원 동쪽으로는 조그마한 채마밭을 두어 집 안에서 간단한 채소들을 심어 먹을 수 있도록 하였고, 북쪽에서 2단으로 정원을 꾸미고 사계절 감상할 수 있는 다양한 꽃과 나무들을 심었다. 장대석으로 2단의 화계를 만든 것은 민가 주택에서는 가옥의 가장 깊숙이 살고 있는 여인과 아이들의 정서 생활에 중요한 부분으로, 바깥주인의 특별한 노력으로 넓고 화려한 정원을 만들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가옥의 안채는 문 위의 상인방 사이를 높이고 하얀 회벽으로 마감한 면을 넓게 확보함으로써 어두운 나무의 색과 하얀 회벽의 비율이 잘 어울려 깨끗한 느낌을 주고 있다. 더욱이 방 위에 다락을 두어 여기에 창문을 두는 예가 많이 있으나 이 가옥은 벽으로 마감을 함으로써 더욱 그러한 느낌을 들게 한다. 

 

 

 

 

 

 

 

 안방과 부엌이 연결되는 서쪽의 날개채에도 한 칸 크기의 별도 대청마루를 두어 안방을 중심으로 마루로 둘러쳐진 구조를 이루고 있으며, 여름에 바라지창을 열어 놓으면 안방은 별도의 정자처럼 느껴지는 특별한 공간 연출을 하게 된다. 이 날개채의 뒤쪽으로 툇마루나 대청을 열면 기와 담장이 앞을 막고 별도의 작은 공간이 나타나는데, 담장의 높이는 서면사당 앞 정원의 아름다운 나무들과 꽃들을 감상할 수 있으며, 앉으면 멋진 소나무의 모습을 감상할 수 있다. 이곳은 안주인만의 독립적인 마당으로 사랑채와 뒤뜰로 연결되는 비밀통로이면서 이 집에서 가장 깊숙한 공간이다.

  

 

 

 

 

 

 

 

 

 

 

 

 

   

이 마당의 협문을 통하거나 사랑채 뒤편으로 돌아가면 사랑채와 약간 비켜선 축으로 가묘(家廟)로 향하는 길이 나온다. 안채 서북쪽에 별도로 마련한 이 맞배지붕의 사당 건물도 인상적이다. 사당은 일반적으로 불천위를 모시는 장소로 삼문에 세 칸의 공간을 가지며 맞배지붕으로 구성된다는 법도를 지키고 있다. 특히 위치에 대해서는 집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가능한 동쪽 방향에 지어 놓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이 집은 대지가 평지이기에 가장 뒤쪽으로 방향을 하고 있다. 주좌를 갖춘 주춧돌을 이용하고 그 위에 원기둥을 배흘림으로 깎아 세우고 소로를 수장하는 방법으로 되어 있다.

 

대부분의 사당은 간단한 가칠 정도나 혹은 화려한 단청으로 채색하는 경우도 있으나 이 집은 나뭇결을 그대로 살리고 소로를 받치는 정도로 장식을 하여 장엄함과 단청으로 채색하는 경우도 있으나 이 집은 나뭇결을 그대로 살리고 소로를 받치는 정도로 장식을 하여 장엄함과 엄숙함을 차분하게 표현하고 있다 규모는 정면 세 칸 측면 한 칸의 크기로 반칸을 뒤로 물려 앉히고 가운데 어칸은 기둥 간격을 넓혀 2분합 넉살무늬창이 달린 넌출문을 달고 좌우로는 한 칸의 넌출문을 달았다. 규모는 작지만 사찰의 대웅전과 같이 커다란 건축물에서 표현되는 건물의 중심 기둥 사이인 어칸의 폭을 넓히고 좌우 칸을 좁게하여 위계성을 표현하는 기법을 쓰고 있다.

 

 

 

 

 

 

 

 

 

 

 

 

 

 

 

 

 

 

 

 

 

 

 

 

 

 

 

 

 

 

 

 

 

 

 

 

 

 

 

 

 

 

 

 

 

 

 

 

 

 

 

 

 

 

 

 

 

 

 

 

 

 

 

 

 

 

 

 

 

 

 

 

 

 

 

 

 

 

 

 

 

 

 

 

 

 

 

 

 

 

 

한편 경주 최씨 고택 옆에 자리 잡은 중요무형문화재 제86-다호인 교동법주를 만드는 최씨 댁은 교동마을에서 법주를 생산하는 집으로 꼭 보아야 한다. 최부자댁 옆에 자리하는 이 집은 'ㅡ'자형 대문채와 'ㅁ'자형 안채로 구성되어 있는ㄷ, 한옥을 이렇게 예쁘게 꾸밀 수 있구나 하는 감탄이 절로 나온다. 거기에 심어진 꽃들이 토종이냐 아니냐는 차후의 문제이다. 

 

 

 

 

 


대문채는 한 켠에 대문을 달고 사랑마당과의 높이 차이에 의해 부분적으로 지붕의 높이를 높이지 않고 지붕의 일부를 줄여 표현하고 있다. 이는 지붕을 높이자니 옆 건물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기에 지붕을 평대문으로 하고, 사랑마당과 높이차이를 이용하여 지붕의 일부분을 생략함으로써 대문의 위치가 쉽게 표현되고, 대문의 높이 차이로 인하여 사랑채의 안부분이 쉽게 눈에 띄지 않아 사생활을 보호 받을 수 있다는 도편수의 묘안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참고 - 네이버 지식백과

   

 

 

▶ 대둔산에 다녀왔습니다 

 

▶ 청남대 가볼한곳 추천합니다

 

▶ 담양대나무축제 죽녹원 가볼만한곳이네요  

 

 

 

 

 

 

행복하고 즐거운하루이어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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